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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 열 처녀의 비유(The Ten Virgins)-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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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689회 작성일19-11-16 17:10

본문

열 처녀의 비유(The Ten Virgins)-주의 재림을 기다리며(25:1-13)

 

C. H. 매킨토쉬

 

우리는 이제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천국을 제시하시는 주님의 엄숙하신 강화(講話)의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교훈은 가장 중대하고 의미 있는 비유로서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종의 비유보다 더 적용 범위가 훨씬 넓으며, 신앙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 전체(참된 신앙 고백 +거짓된 신앙고백을 한 그리스도인 전체)를 포함하므로 그 말씀(ministry)의 범위를 하나님의 집안인지 바깥인지를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직접적이고도 분명하게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25:1).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유대인의 남은 자들에 대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편협 되게 해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문맥이나 단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건대 그러한 해석은 불가한 것입니다.

 

전체 본문을 더 깊이 살펴보면 볼수록 이 강화의 유대적인 부분은 마24:44절로 마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없이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 본 결과로 마태복음 2445절에서 2530절까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31절부터 끝까지는 이방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놀라운 강화(講話)의 질서와 그 풍성함은 사려 깊은 독자들을 사로잡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이방인에게 각각 제시되고 있으며, 각각은 그 각각에 해당하는 강화라는 뚜렷한 근거(ground)들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각각의 강화 속에는 각자에게 해당하는 각각의 별개의 원칙들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서로 간에 섞이는 것도 없으며 서로 상이한 점들로 인하여 결코 혼동되는 일도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 깊은 강화의 말씀, 질서, 풍성함, 그리고 의미심장함 등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 보는 이로 하여금 각 심령(soul)에게 "경이와 사랑과 찬미"로 충만하도록 하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전체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한 후에는 우리 입술에 다음과 같이 사도의 감동된 말씀과 동일한 말씀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더군다나 열처녀의 비유에서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정확한 단어를 살펴보면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곧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을 반드시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저와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공히 엄숙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말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 구절들을 우리 마음에 다시 한 번 적용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25:1) 기독교 초대 교회는 여기에 언급하고 있는 사실 즉 고대하던 신랑의 다시 오심을 맞이하러 나가는 모습으로 그들 모임의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초대 교회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의 일들로부터 분리되어 저희 마음의 영과 저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이, 저희를 사랑하시는 신랑 되시는 구주 곧 저희가 간절히 고대하던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는 일에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 곧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는 것은 나간다고 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moral) 것이며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구주의 오심을 갈망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간절한 심령의 발현(outgoing)인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시대에 주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의 마음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주님의 신속한 재림과 그 확실한 소망은 여러 교회에 주신 서신 서 들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아들이 하늘로서 강림하심을”(살전1:10) 기다렸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저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오셔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소망의 지식과 능력이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저희 마음을 분리하도록 역사했던 것입니다. 저희의 밝은 하늘의 소망은 땅에 속한 일들에 마음을 쓰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희는 다만 구주(Saviour)를 우러러보았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언제라도 오실 수 있음을 믿었으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관심은 저희를 데려가시는 그 순간을 - 의심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전심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그와 같은 집중력을 가지고 - 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문자 그대로 마치 학이 발끝을 들고 머리를 쭉 뻗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 그 이상으로 주의 오심을 학수고대(the very tip-toe of expectation)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우리들의 마음에도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전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신랑을 맞으러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지성적인 마음을 가진 자라면 유대인의 남은 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저희 메시야를 맞이하러 나가지 아니할 것이며, 이와 반대로 유대인은 주님께서 오셔서 그분의 발로 감람산을 밟으실 때까지 저희의 위치(position)와 환경들(circumstances) 가운데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주님께서 오셔서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이 땅에서 저희를 데려 가시도록 고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희 땅에서 저희를 구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며 그 때부터 천년의 기간 동안 주님의 평안과 복된 의의 통치 아래서 저희를 행복 가운데 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맞으러 나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이 땅을 떠나기를 예비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땅 위에 정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저희를 부르신 하늘의 영광을 보기위해 그리고 저희와 약혼한 하늘 신랑 곧 저희로 기다리도록 가르침 받은 그 주님의 신속한 재림을 보기 위해 진지하고도 거룩한 바람 가운데 간절함으로 맞이하러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되고 거룩하며(divine),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세와 상태인 것입니다. 또 이러한 사랑스런 생각(idea)은 놀랍도록 현실적인 생각으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생각들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실제적인 삶의 자세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자신들 모습을 바라볼 때 말할 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계 안에는 참으로 거듭난 자만큼 거듭나지 못한 거짓된 신앙 고백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는 "알곡" 만큼이나 "가라지"도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기독교계에는 참으로 거듭난 자와 거짓된 자, 진짜와 가짜, 실한 것과 허한 것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일은 마지막 시간 곧 신랑이 오시는 그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가라지들은 알곡으로 회심하지 않을 것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로 변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결코 그들은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는 결국 가라지들은 불에 태워질 것이며 어리석은 자들은 문밖으로 쫓겨 날 것입니다. 현재 운영되는 복음적인 여러 기구들 - 복음의 전파로 세상에 여러 다양한 유익을 끼치는 개인이나 단체 - 에 의한 점진적인 개선(거듭나는 역사)과는 관계없이 우리가 이 모든 비유와 신약성경 전체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것은 천국은 매우 슬프게도 악과의 혼합 가운데 드러나게 되며; 부패케 하는 역사가 있으며; 대적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함이 있으며; 원칙과 신앙고백과 실행에 있어 악한 자의 계속되어 온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세상 끝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신랑이 오시는 때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저희 모두가 회심하게 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저희 모두가 현재 활동 중인 모든 복음적인 기구들에 의해 주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면 신랑이 오시는 그때에 어찌 슬기로운 자들만큼이나 어리석은 자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단지 비유요 예표로써 말해진 것입니다. 무엇의 예표이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온 세상의 회심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회심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며 우리 주님의 엄숙한 가르침을 시정잡배(市井雜輩)의 농간으로 모욕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열처녀의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논쟁의 여지없이, 신랑이 오시는 때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분명하게 나타나리라는 것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은 믿는다고 신앙고백은 하였지만 이전에 결코 회심한 적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라도 이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신랑이 오시기 전에 온 세상이 회심하게 되리라는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처녀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처녀에 대한 이야기는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충만합니다. 그것은 매우 간결하지만 너무도 의미심장한(comprehensive)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이 미련한 자들은 외적인 신앙고백은 있었지만 내적인 실제 곧 영적인 생명, 기름부음, 영생의 원천으로서 생명선(vital link), 즉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연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고백의 등()은 있지만 이름뿐이며(nominal), 이론적이고(notional), 오직 머리로만 이해한 신앙(head belief)으로 심지가 말라있었던 것입니다.

 

이일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 주위에는 양적(量的)으로 침례를 통한 신앙고백은 현저하여 무수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외적인 모양은 있지만 내적인 실제가 전혀 없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모두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의 등()은 각자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그러나 아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 곧 기름을 자기 그릇에 담고 있는 이가 몇 사람이나 되며, 성령께서 거하시는 이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인지! 이것이 없이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헛되며 무가치한 것입니다. 거기에 비록 최고 수준의 신앙고백이 있을지라도; 혹은 그곳에 가장 정통적인 신앙원칙(creed)과 교리가 있을지라도; 또한 침례 받은 자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지라도; 그리스도인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여하고 정식으로 지체로서 영접되었을지라도; 혹은 주일학교 교사일지라도; 성직수임을 받은 사역자라할지라도; 이 모든 조건을 다 만족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divine) 생명의 불꽃을 소유한 자가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줄기의 하늘빛도 소유하고 있는 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자도 아닌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속이고 양심을 죽이며 심령을 황폐케 하는 종교에 대해 매우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 오는 것을 저들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종교는 죽은 자에게 살아있다는 이름을 주며, 세상에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없이 또한 소망 없이 살아가게 합니다 - 이 종교로 말미암아 저들은 신랑이 오실 때까지 거짓된 확신으로 저희의 심령을 부축하게 하여, 그 날에야 비로소 저희 눈이 열려 보게 될 것이지만 그 때에는 너무 늦어 있음을 저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리석은 처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지혜로운 처녀들과 거의 같아 보입니다. 보통의 범상한 관찰자는 때가 차기까지 그 차이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는 모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혜로운 처녀도 어리석은 처녀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졸며 자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소리가 날 때에 모두가 일어나서 등을 간검(trim)하였는데, 여기까지 서로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저희의 등을 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신앙고백의 등은 생명이 없고, 관념적이고, 명목상의 신앙이라는 기름이 젖어있지 않은 마른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아! 이 일은 아무 가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이일은 아무 가치가 없거나 무가치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악한 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영원히 파멸시키는 기만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매우 뚜렷한 구별이 있습니다. 곧 이 엄청나게 크고 광대한 경계선이 무섭고 소름끼칠 정도로 분명하게 그렇게 발()하여지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25:8절 그리고 그 이하 부분을 보라). 이것으로 보아 저희 등이 켜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불은 저희가 불을 붙인 불이 아니요 저희가 스스로의 힘으로 꺼지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그러한 불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 어리석은 자의 등만이 불이 꺼져가고 있었으며, 잠시 후에는 이 불이 꺼질 것입니다. 그들의 불은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공급받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입술만의 고백이었으며, 머리로만 이해한 신앙으로부터 공급받았던 불이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 만큼 길고 오래 가는 불이었지만 저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한 밤의 그 두려운 어둠에 남겨질 참이었습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25:8). 이 얼마나 두려운 발견입니까! "신랑이 가까이 왔는데 우리 등에 등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헛된(hollow) 신앙고백이 주님의 오시는 빛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 모두가 옳은 줄 여겼노라. 우리는 그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였고 동일한 모양의 등()과 동일한 종류의 심지(wick)를 가졌었노라; 그러나 아아!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 가운데 처해 있구나! 우리 자신을 속였던 것과 우리에게 필요하였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영, 거룩한 분으로부터의 기름부음과 및 신랑과 연결된 연합된 삶을 결()하였음을 이제 발견하게 되었구나! 이제 우리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 너희 슬기로운 자들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자비를 따라 우리에게 조금만 나눠 달라. 꼭 필요한 단 한 방울이라도 주어 우리로 영원히 멸망치 말게 하라" 하고 말하지만 그 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헛된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기름을 다른 이에게 나눠줄 수 없었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친히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떤 형태의 불을 붙일 수는 있지만 기름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기름은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25:9-10). 이것은 바로 우리를 돕고 우리를 받쳐주던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 그가 거룩한 사람이건 탁월한 교사이건 -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는 일과 및 우리 교회, 우리 신조와 우리 성례를 부지런히 세우는 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기름입니다. 기름이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에게서도 아니요, 교회에게서도 아니요, 성인들에게서도 아니요, 교부나 목사나 전도자들에게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름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미 할지라, 그리하면 주님은, 기름을 거저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은 영생 이니라."(6:23)

 

그러나 이 기름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각 사람은 어찌하든지 이 기름을 소유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 믿을 수도 없습니다. 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각자는 반드시 자신을 위해 하나님과 대면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영혼의 연결고리는 개인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에 있어 다른 인간 중보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종교나 신학 혹은 성경의 문자를 가르치지만; 결코 우리에게 기름을 줄 수 없으며; 그 사람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매우 작은 단어이지만, 심히 귀하고 귀한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하나님이 소중한 만큼이나 소중하고 귀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공기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고; 햇빛처럼 은혜로 주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는 아침이슬처럼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여 말하건대,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것을 개인적으로 얻어야 하며, 그것을 친히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救贖)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49:7-9).

 

이 엄숙한 사실 앞에 당신은 과연 무엇이라 핑계할 것입니까? 당신은 정녕 슬기로운 처녀입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입니까? 당신은 과연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한 자임이 분명합니까? 아니면 단지 종교를 신봉하여 교회의 정기행사를 따르며, 이 땅위에서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일에 만족함으로써 자신을 진정으로 하늘에 속한 자되게 하는 일에 실패한 자입니까?

 

우리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그것에 대해 지금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신앙고백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으며 컴컴한 어두움 - 당신이 남겨지게 될 어두움 - 곧 영원토록 밤이 지속되는 바깥 어두운 곳 가운데 당신이 남겨지게 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수려한 가마가 혼인잔치를 향해 떠나고 그 문이 닫힌 채 남게 되는 일은 얼마나 끔직한 일이겠습니까?; 바로 당신의 면전에서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 이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입니까,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25:11b) 그러나 얼마나 두려우며 절망스러운 대답입니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25:12b)

 

, 이 엄숙한 일이 아직 문이 열려있는 동안에 또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그리고 아직 은혜의 날이 단축되지 않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에 사무치길 바랍니다. 자비의 문이 당신 앞에서 영원히 닫히게 될 그 때를 향해 시간이 신속히 날아가고 있으며,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당신의 귀한 영혼이 영원한 절망 속으로 내던져질 날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당신을 그 죽음의 잠에서 깨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당신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의 복된 발아래서 찬미와 경배를 올리게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는 슬기 있는 처녀에 대해 잠깐 언급하기를 원합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에 의하면, 슬기 있는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매우 구별되는 점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단순히 신앙고백을 하는 자와 참된 신자의 차이점은 참된 신자의 경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마음에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저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을 받은 자라는 것이며; 성령께서 저희 안에 인침으로, 보증으로, 기름부음으로 그리고 증인으로써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은 이제 주 그리스도 예수 - 이토록 위대하고 놀라운 사실은 확실하며 - 너무 엄청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권은 우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 심령이 거룩한 찬미와 함께 엎드리게 하며, 그리스도의 성취하신 구속은 우리를 위해 이토록 위대한 축복을 마련한 것입니다 -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신자들의 특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토록 고상(高尙)하고 거룩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저희가 다 졸며 잘새!"(25:5)라고 기록된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슬픈 일이 되는 것입니까? 어리석은 처녀나 슬기 있는 처녀나 할 것 없이 모두 잠에 빠졌던 것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모두가 예외 없이 주님의 오심에 대한 신선하고, 때론 열렬하고 강력한 소망을 잃어버린 채 모두가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이 비유가 주는 교훈(statement)이며, 더군다나 역사 안에서 입증된 사실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전체 기독교계가 잠에 빠져있습니다. "그 복된 소망"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지평 위에 그토록 밝게 비추었건만 어찌하여 그렇게나 신속하게 이지러지며 사라지게 되었는지! 우리가 1,800여년의 교회 역사의 장을 살펴본 대로, 사도교부 시대로부터 최근세기까지 교회 최대의 소망 - 찬송 받으실 신랑의 인격적인 재림 - 에 대한 지성적인 진술(intelligent reference)을 찾아보는 일은 헛된 일일뿐입니다. 사실상, 그 소망은 교회가 실질적으로 잃어버린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이단시되기까지 하였던 적도 있습니다. 말세를 만난 지금까지도 수천 수만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 설교하거나 가르치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로 지난 반세기 동안 이 부분에 대해 매우 큰 변화를 목도하게 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바입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대 각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잊혀져왔던 진리들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상기토록 하셨으며, 그 남은 자들 가운데 신랑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광스러운 진리를 회복시키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신랑이 더디 오는 이유를 밝히 알게 되었는바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보배로우신 주님의 지혜(reason)입니까!

 

그러나 이제 저희는 이러한 오래 참으심 이외에도 주님이 매우 가까이(at hand) 계시다는 사실도 보게 되었습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기를,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심령을 흥분케 하는 외침이 수천 수만의 메아리가 되어,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까지, 강의 발원지에서 그 끝까지 강력한 능력으로 퍼져나가, 오직 한 분만을 기다려왔던 온 교회를 잠에서 깨우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 마음의 복스런 신랑께서 영광가운데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우리 모두 모든 성도들을 깨우도록 합시다. 세상의 안락 가운데 게으름과 나태와 방종에 빠진 자들을 흔들어 깨우도록 합시다 - 종교적 형식과 절차주의의 영향 아래서 무기력해진 자들을 분발시키도록 합시다 - 거짓 신학의 교리(dogma)를 벗어 던지고 우리 마음의 깨끗한 영과 애정으로 우리의 다시 오시는 신랑을 맞으러 함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자신의 엄위한 말씀을 우리 심령에 새롭게 하는 능력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여 주시길 강력하게 바라며, 우리 마음과 우리 삶의 언어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둠의 세력이 신속히 엄몰하는도다:

너희 은혜의 자녀들이여, 늘 깨어 있어

잃어버린 영혼을 열정으로 찾아 구하도록 하라

아아, 저희 구속의 값이 얼마이련가!

구주의 큰 사랑 노래하며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니,

주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도다

- "그 때가 내일이 될지 아니면 당장 오늘밤이 될지" -

그러므로 우리 허리를 동이고 등불을 밝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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