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 찰스·스펄젼의 구원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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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884회 작성일19-11-16 20:15본문
나를 보라
「찰스·스펄젼」은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대설교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에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직접 「찰스·스펄젼」그 자신의 입을 통하여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나이 겨우 20세 안팎이었지만 내가 겪었던 그 무서운 심적 고민과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이와 같은 고민 가운데서 오년을 헤맨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공포를 직접적으로 뼈저리게 느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감히 저야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죤 번연」이 쓴 『넘치는 은혜』라는 책 속에서 이 공포에 대하여 잘 묘사되어 있는 데 바로 그 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실상이야말로 바로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바로 그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죤 번연」이 빠져 들어간 바로 그 동일한 구렁 속으로 까지는 내가 실제로 빠져 들어가서 바로 그 동일한 구렁을 직접 내 발로 디뎌보지 못한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내가 헤매고 허우적거렸던 그 깊은 심연 속에까지는「번연」자신도 역시 실제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인 것입니다.
나의 방황하고 길 잃었던 세계는 태양 없는 하늘과도 같이 캄캄한 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가 너무 중하게 보여서 내게 다시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때 나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진지하고 열심히 기도했는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하나님의 응답은 희미한 별빛만큼 이라도 나에게는 새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또한 성경 말씀은 성경말씀대로 부지런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약속은 성경의 모든 무서운 경고보다 더욱 더 내 마음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락이었고,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확신했던 것입니다.『나는 아무리 재보고 따져 보아도 죄인이 분명하다.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은 죄인 아닌 사람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해당하고 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이래서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사변(思辨) 속으로만 곤두박질해 들어갔었습니다. 내가 겪은 이 당시의 나의 고통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이야기 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긴 하였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들려주었으며, 영생과 영멸은 깨닫게 해 주었고, 내가 죄인된 것까지는 깨우쳐주었었지만, 내게 복음을 전해주고 이야기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은 소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국가에서 살고 있었지만, 비록 어린아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복음의 단순성과 누구든지 값없이 받을 수 있는 이 복음의 단순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도시의 곳곳에 있는 교회를 거의 모두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말씀드리는 말이지만 단순한 복음을 단순하게 복음 그대로 설교한 설교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 모든 설교자들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파하였습니다. 나는 그 설교자의 절대 주권에 관한 설교 내용 자체에는 공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그 때 당시 죄인인 나에게 그런 것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또 다른 한분 훌륭한 목사님은 항상 율법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 밭을 갈아놓고 씨를 뿌려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내 심령에 그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 때 당시에 나는 죄인인 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죄인임을 깨닫고 있었고 구원 받을 길만을 일심으로 모색하고 있는 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어떤 한 분 목사님은 이번에는 격려와 권면 같은 아주 실제적인 내용의 설교를 해 주는 분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마치 임전태세 중에 있는 군인들 앞에 이것저것 마지막으로 명령하는 군대의 사령관과도 같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내용의 설교는 절름발이를 모아놓고 작전명령을 하달하는 것으로 밖에는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나 같은 자에게는 그와 같이 좋은 권고와 격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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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나도 익히 보고 듣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전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바로 이 사건만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와 같은 미궁 속을 지금도 헤매고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날은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참으로 긍휼히 여기셔서 큰 눈바람을 보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오늘날도 그 어둠과 실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날 아침도 여느 일요일 아침과 마찬가지로 나는 또다시 나의 영적 해결을 위하여 어떤 하나의 교회를 향하여 길을 가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나쁘고 또 눈바람이 너무 크고 세차게 불어서 마음에 둔 어느 한 교회로 가던 중도에서 그 교회로 가는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었던 나는 좁은 골목길을 꺾어 들어가서 마침 그 곳에서 발견한 부근의 어느 작은 예배실로 들어갔습니다.
초기 감리교회의 보잘 것 없는 예배실 이었으므로 이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래야 고작 열 두 서너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그날 아침 설교를 맡은 설교자는 그 날 아침의 악천후의 일기 관계로 나오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심한 눈보라 때문에 길이 차단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가난하게 보이는 남루한 옷차림을 한 직공 차림의 한 남자가 대신 설교하러 강단으로 나가는 참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남자가 재봉공인지 또는 구두장이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여튼 그런 류의 사람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설교자라면 어느 정도 교육은 최소한도로 좀 받은 사람이 해야 좋은 것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그 때 나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표준에서 볼 때는 누가 보아도 아주 얼뜨기란 평을 듣기에 충분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기가 택한 본문 외엔 무슨 말을 엮어야할지 조차도 도저히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본문 말씀을 빼놓고는 지식이라곤 전혀 들어있지 않은 그러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날 아침 그가 선택한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이사야 45:22)이었습니다. 그는 본문을 읽는 데 발음도 제대로 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그와 같은 것은 내게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오래 동안 구하고 갈망하던 한줄기의 서광을 던져주는 그러 한 말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내게도 희망의 빛이 비쳐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느 모로 보드라도 이 말씀은 참으로 간단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바로「보라!」「보라!」 「보라!」는 말씀입니다. (주(註): 이사야 45:22의 우리말 번역 『앙망하라』는 영어 역으로는 눈을 들어 단순히『보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어인 히브리어 『파나』도 『얼굴을 돌린다.』, 『얼굴을 대한다.』등이 주요한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본다」는 것은 조금도 힘 드는 일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이 무슨 발꿈치를 드는 일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도 놀릴 것조차도 없는 정말 힘이라고는 하나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만큼 쉬운 일인 것입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거저 「보기만 해라!」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는」데는 단돈 십 원도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동서를 막론하고 세상에 없는 바보라도 다「볼」수는 있는 것입니다. 「보기」위하여 그 힘든 대학교 공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나, 또는 이 세상 누구라 할지라도 다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라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이 바로 이 말을 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라」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이 말씀에 열중한 나머지 드디어 그의 출신지를 나타내 주는 영국 남동부 지방 사투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역자주: 우리분위기에 맞추어서 보면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 거참, 당신네들은 대개 모두 당신네들 자신만을 본다 말이여 거기는 볼 필요 없당께, 아, 아무리 당신네들 자신을 보아도 신기한 꼴은 못 본다 말이여. 그런디 어떤 사람은 또 하나님 아부지를 먼저 본단 말이여. 우리 아부지 하나님은 차츰 뒤에 보란 말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말이여. 당신네들 중 어떤 사람은 또 이런 말을 하네그랴,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보지.」 이런 재변이 있나, 지금 당장은 그 일 허구는 상관이 없단 말이여 이 사람들아. 그리스도를 봐요. 제발 그리스도를! 여기 있지 않나 벼, 여기「나를 보라」구 나를 봐.』
그리고 이 고마운 사람은 자기의 본문 구절을 양 팔을 벌려 제스처를 써가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나를 보라. 십자가에 달려 있는 나를 봐. 나를 봐! 죽어, 묻힌 나를 봐, 나를 봐! 부활하는 나를 봐. 나를 봐! 승천하는 나를 봐. 나를 봐! 아버지의 오른 쪽에 앉은 나를 봐. 나를 봐! 나를 봐! 나를 봐! 』
이 정도로 이어나간 후, 그리고 같은 말을 한 여남은 번은 더 되풀이한 후, 그 사람은 이제 밑천이 달렸습니다. 그럴 때쯤에 그는 복도 쪽에 웅크리고 앉은 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사람이 워낙 적게 모였던지라 그는 단박에 낯선 사람인 나를 가려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시 말씀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나에게 대한 직격탄을 쏘았던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 대단히 풀이 죽어 보이는데 말이여.』
딴은 사실이었지요. 그렇지만 강단으로부터 크게 풀이 죽어 있는 내 몰골이 지적당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내게 있어서는 실로 나의 인생의 획을 긋는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자넨 언제나 풀이 죽어 있는 그 모양 그 대로가 되어 있을 걸세, 살아도 그 모양이고 죽어도 그 모양이고, 여기 이 본문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말이여. 그러나 자네가 이 본문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말이여, 이 순간 당장 구원될 수 있는 것이여』
그러자 그는 소리 높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 여보게 젊은이! 제발 예수 그리스도를 좀 보소! 』
나는 그 때 그 순간 진실로『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나를 감싸고 있던 나의 모든 구름은 완전히 걷히고 말았습니다. 나의 흑암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진정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자리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감격과 희열로 찬송 하고 또 찬송할 수 있을 나의 심령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아, 이전부터 이렇게 단순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진작 내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지긋지긋한 오년이란 긴 세월을 그렇게 허송세월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 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다는 이 단순한 복음이야기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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